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희/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(문단 편집) === [[김영삼]] === || [[파일:박정희김영삼.jpg|width=100%]] || || 1975년 박정희 대통령-김영삼 신민당 총재 영수회담 || 1961년 박정희가 [[5.16 군사정변]]으로 [[대한민국 제2공화국|장면 내각]]을 무너뜨리고 집권하자, 당시 [[민주당(1955년)|민주당]] 구파 소속 정치인이었던 김영삼은 반(反)군부 투쟁에 나섰다. 1963년에는 군정 연장 반대집회에 참여한 혐의로 [[서대문형무소]]에 수감됐었다. 1969년에는 박정희의 [[3선 개헌]]을 비판하던 와중 자택 인근에서 [[김형욱|남산 멧돼지]]에 의해 [[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|초산 테러]]를 당할 뻔했다. 다만, 배후에 박정희 정부가 있었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[[미제 사건]]이다.[* 김대중 납치 사건도 현재 이 사건의 당사자인 박정희, [[김대중]], [[이후락]]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누가 납치를 지시했는지는 정확하게 알아낼 길이 없다. 그나마 [[김종필]]이 [[http://mnews.jtbc.joins.com/News/Article.aspx?news_id=NB10960559|직접 인터뷰를 했는데]], 그의 증언에 의하면 이후락이 단독으로 범행을 지시해놓고 박정희한테 갑작스럽게 보고를 했다고 한다. 김영삼은 납치 사건을 매우 비판했다. 나중에 김대중과 결별한 후에도 "이 사건은 박정희가 김대중을 노린 테러"라고 언급했다. ] 김영삼의 [[회고록]]인 <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>에 적힌 내용에 의하면, 1975년 영수회담에서 김영삼과 박정희가 단독회동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. 여기서 박정희는 자신은 권력에 미련이 없고 곧 민주주의를 하겠다고 김영삼에게 약속했지만, 바로 아래 단락에 서술된 박정희의 행보를 봤을 때 그 약속에 진심이 담겨있다고 보기는 힘들다. 1979년 [[YH 사건]]으로 김영삼은 정국의 중심에 섰다. 이 사건으로 김영삼은 [[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|신민당 총재 직무를 정지당한 뒤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당하기까지 했고]], [[부마민주항쟁]]을 촉발시켰으며, 결과적으로 [[10.26 사건]]의 도화선이 되어 [[대한민국 제4공화국|유신 체제]]를 붕괴시켰다. 10.26 사건 이후 김영삼은 박정희를 조문하면서 "하나님도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.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." 라고 했으나... 2003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에 '''"총 맞아도 싸다"''' 고 생각했다고 밝힌 걸 보면 그냥 겉치레일 가능성이 높다.[[https://youtu.be/cejoFCVzCs0|7분 20초부터]] ~~사실 이게 본심이었단다~~ 2009년 인터뷰에서 김영삼은 "[[김대중]]과는 화해했지만 '''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.'''"라고 못을 박기까지 했다. 2012년 [[김문수]] 당시 [[경기도지사]]에게 "[[박근혜]]는 [[칠푼이#s-2|칠푼이]]다."라고 혹평할 정도로 김영삼의 박정희 일가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.[[https://m.yna.co.kr/view/AKR20120711202600001|#]] 2017년 [[자유한국당]] [[홍준표]] 당대표가 당사에 [[대한민국 보수정당]]을 상징하는 인물들인 [[이승만]]·박정희·김영삼 [[대한민국 대통령|대통령]]의 사진을 걸기로 하면서 김영삼은 공교롭게도 '용서할 수 없는 사람'인 박정희와 나란히 자리하게 되었다.[[http://m.hani.co.kr/arti/politics/polibar/819526.html#cb|#]] 그 이유는 [[전두환]]·[[노태우]] 등 신군부의 [[민주정의당|민정계]], 박정희·[[김종필]] 등 구군부의 [[민주공화당|공화계]], 그리고 김영삼의 [[민주계#s-2]]가 [[3당 합당]]을 통해 창당한 [[민주자유당]]이 자유한국당(現 [[국민의힘]])의 실질적인 기원이기 때문이다. 그러니까 민주자유당은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[[대경권|TK]] 군부세력과 김영삼을 중심으로 한 [[부울경|PK]] 민주세력의 물리적 결합이었던 셈이다.[* 훗날 김영삼이 집권함에 따라 민주계가 주류가 되면서 [[자유민주연합|김종필과 결별하고]], [[전두환·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|전두환·노태우를 구속시키고]], 당명까지 [[신한국당]]으로 바꾸면서 민정·공화계는 보수정당에서 완전히 청산되는 듯 했으나... [[1997년 외환 위기]]라는 [[문민정부]] 최대의 위기상황 속에서 박정희의 딸 [[박근혜]]가 정계에 입문하면서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다. 이후 [[15대 대선]], [[16대 대선]]에서 [[이회창]]이 민정·공화계와 민주계 양쪽 모두의 지지를 받으며 두 세력간의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봉합되기도 하였다. 그러나 [[17대 대선]]의 [[한나라당]] 경선에서 박정희의 딸 박근혜와 YS키즈 [[이명박]]이 대립하면서 보수정당의 계파갈등은 더욱 깊어져 갔다. 17대 대선에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자, 2008년 [[18대 총선]]에서 [[친박|친박계]]에 대한 공천 학살이 이루어졌다.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[[레임덕]]을 겪고 박근혜가 유력한 대선주자로 떠오르던 때인 2012년 [[19대 총선]]에선 반대로 [[친이|친이계]]가 공천 학살을 당하게 되었다. 2012년 [[18대 대선]]에서 박근혜도 대통령이 되었으나 2016년 [[박근혜-최순실 게이트]]로 인해 탄핵, 구속되어 징역 20년을 선고받았고 이로써 구심점을 잃은 친박계는 와해되기 시작했다. 마찬가지로 친이계도 수장 이명박이 [[다스 실소유주 논란]] 등으로 인해 구속되어 징역 17년을 선고받음에 따라 와해되었다. 현재 국민의힘은 당내 가장 큰 두 세력이 구심점을 잃고 표류하고 있는 셈었지만 지금 [[2022년]] 현재 [[친박]] [[친이]]를 이어 [[친윤]]이 구심점을 유지하고 있다 애초에 [[친박]]+[[친이]]=친윤이기 때문에 계파갈등이 크게 없다 지금 바른정당계인 [[친유]] [[친오]] 및 [[친홍]] [[친안]]이 있지만 그들은 예전 [[친박]], [[친이]] 및 현재의 [[친윤]]보다 너무 세력이 작기 때문이다 그중 친유는 [[이준석]] 징계로 인해 크게 힘을 잃어가고 있는 실정이다.] 이승만은 [[4.19 혁명]] 이후 [[자유당]]이 공중분해 되어버렸기 때문에 현재의 보수정당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인물이지만 [[초대#s-2]] 대통령이기도 하고 어쨌든 [[보수주의]] 대통령이었던 것은 맞기 때문에 같이 걸어둔 듯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